⑤편을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들어온 질문이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지우면 안 되나요.”
심정은 이해합니다. 파일이 없으면 문제도 없을 것 같으니까요. 반환 요구 메일을 받은 날 밤에 휴지통을 비우는 분이 실제로 많습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임의로 지우는 것은 권하지 않습니다.
삭제가 새로운 죄가 될 수 있는 지점
형법 제155조 제1항은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하거나 은닉하는 행위를 처벌 대상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단어를 봐야 합니다. ‘타인’과 ‘증거’입니다.
대법원은 증거인멸죄의 ‘증거’를 수사기관·법원·징계기관이 형벌권 또는 징계권의 유무를 확인하는 데 관계있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자료로 봅니다. 그리고 아직 수사절차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도 장차 형사사건이 될 수 있는 경우를 포함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 2026. 1. 15. 선고 2024도15728 판결고소장이 아직 접수되지 않았어도 ‘증거’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사가 시작되기 전에 정리하면 된다”는 계산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습니다
같은 판결에서 대법원은 반대 방향의 판단도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형사처분이나 징계처분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자료를 인멸한 경우에는, 그 행위가 다른 사람의 사건에 관한 증거를 함께 없앤 결과가 되더라도 원칙적으로 증거인멸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조문에 ‘타인의’ 사건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어를 위한 인멸은 원칙적으로 이 죄가 아닙니다.
여기까지 읽고 안심하는 분이 계실 텐데, 상담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붙잡습니다.
예외를 근거로 삭제하면 안 되는 이유
증거인멸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과, 삭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삭제 행위 자체가 이렇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 ✔별도의 영업비밀 침해
- ✔업무상배임
- ✔재물손괴
- ✔계약상 반환의무 위반
- ✔민사상 손해배상
그리고 실무에서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법원이 확인하는 항목 중 마지막은 “회사의 삭제·반환 요청에 어떻게 대응했는가”입니다. 요구를 받은 직후의 삭제는 이 항목에서 가장 나쁜 답이 됩니다.
파일은 사라져도 삭제한 기록은 남습니다.
회사는 이미 접속·다운로드 로그를 확보한 상태에서 연락합니다. 파일을 지우면 반출 사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은닉 정황이 하나 추가됩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곱 가지
- ✔파일을 열람·편집·이름변경하지 않습니다
- ✔삭제 프로그램이나 포맷 기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 ✔개인 이메일·클라우드·USB로 재전송하지 않습니다
- ✔반환 대상과 반환 방법을 회사에 서면으로 확인합니다
- ✔회사가 지정한 보안 담당자에게, 또는 회사가 정한 절차에 따라 반환합니다
- ✔회사가 삭제를 요구하더라도 삭제 대상·방법·완료 확인을 서면으로 남깁니다
- ✔개인자료와 회사자료가 섞여 있다면 전체 포맷 대신 회사와 협의해 분리 처리합니다
여섯 번째가 특히 중요합니다. 회사가 삭제하라고 해서 삭제하는 것과, 혼자 판단해 삭제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이행이고 후자는 은닉으로 읽힙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서면 기록 하나입니다.
이미 지워버렸다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답은 짧습니다.
추가로 지우지 마세요. 복구 흔적을 없애려 하지 마세요.
그 시점부터의 행동이 새로운 정황이 됩니다. 대신 사실관계를 정리하십시오.
언제, 어떤 위치의, 어떤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했는지. 시간순으로 적어두시면 됩니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적어둔 이 메모가 나중에 유일한 방어자료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회사가 삭제하라고 했는데 삭제하면 증거인멸인가요?
회사의 요구에 따른 이행이라면 성격이 다릅니다. 다만 무엇을 어떤 방법으로 지웠고 언제 완료했는지를 서면으로 남겨두셔야 합니다. 기록이 없으면 이행이었는지 은닉이었는지 구분할 방법이 없습니다.
Q. 개인 노트북 전체를 포맷하면 안 되나요?
권하지 않습니다. 개인자료까지 함께 사라지면 나중에 본인에게 유리한 자료도 증명할 수 없게 됩니다. 회사자료만 분리해 처리하는 방향으로 협의하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Q. 아직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 미리 정리하면 되나요?
분쟁이 시작되기 전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다만 회사가 이미 로그를 확인하고 내부 검토 중일 수 있어 ‘연락이 없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환 절차를 먼저 밟는 편이 안전합니다.
지금 판단이 필요하시다면
삭제할지 보존할지는 사건이 어느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정반대가 됩니다. 이 판단 하나가 이후 전체를 바꿉니다.
- ✔반환 요구를 받고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 정하지 못한 분
- ✔이미 일부를 삭제한 뒤 걱정이 되시는 분
- ✔개인자료와 회사자료가 섞여 분리가 어려운 분
- ✔퇴사자에게 삭제를 요구하려는 회사
이 글은 일반적인 법리 설명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개별 사건에 대한 법률자문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안은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개별 상담을 받으시기 바랍니다.